너무 많아서 가끔 정신이 나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리고 여러상황들이 생기게되어 뜻하지않게 내려놓게되었어요.

       그런 식의 연결이 있다고 생각하며 말하는 거예요.

       우울증에 걸려서 우리 안 연못에 빠져 죽었다.

       모두가 답을 알지만 모두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있다.

       80년대생 젊은 작가들이 디지털 시대에서 가상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의 작업을 보여준다면 이우환 박서보 하종현 등 70~80년대 거장의 작품들이 2층에 전시된다.

       생각이나 개념같은건 이해하긴 어렵긴하지만 무한하기 때문에 많은 예술가들이 그 가능성을 실험했던 것이다.

       도시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작가의 경우 스마트폰 컴퓨터 텔레비전 등의 매체를 통해 다양한 소식과 정보를 접하는데 매체를 통해 매개된 정보는 인공적인 가공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치게 된다.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고 재단하지 말자고 생각하게 되는 것.

       반대로 좋아도 티가 난다.

       전시장 안은 시원했지만 어쩐지 폭염의 한 가운데 있는 듯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이 먹먹했다.

       다만 지금은 예술품에 대한 수요가 훨씬 더 많아졌지요.

       직업병이라는걸 알면서도 계속 어떻게든 끌고가고싶었는데 어떻게해도 안되나봐요.

       그 과정에서 의미있는 무언가를 찾길 바라며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작업을 보면서 게임은 진행되는데 이를 보지 못하게 자꾸만 음성에 맞춰진 혹은 상관없는 기호들이 튀어나와 방해한다.

       대중의 취향에 타협하는 전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 동원에 성공하여 자신들만의 잔치로 끝나지 않았다.

       주어진 현실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며 현실을 경시하는 풍조도 생겨난다.

       신생 공간은 2014년 하반기부터 급증한 젊은 작가와 기획자들이 직접 운영하는 전시 공간들을 말한다.

       물론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청년 세대도 힘든 세대이다.

       현대미술을 잘못된 범주에 끼워넣는 태도편집 인터넷 상에서 현대미술 작품에 대해 평가하는 글들은 굉장히 단편적이다.

       기러기는 없는 기러기 전시다.

       우리나라 관객들이 작품 수만 많다고 마냥 박수쳐 주는 순진한 호구들이 아니다.

       제 성향과도 맞지 않고요.

       다르기 때문에 경쟁심도 느끼지 않는다.

       요즘 청년들은 다 자율적이고 뭔가 하고 싶고 그것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

       또한 그 실천이 현재적 삶의 방식을 재고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할 때 전시 작품 전반에서 보이는 다양한 형식적 태도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 고민은 무엇을 만들것인가에서 시작되었지만 왜 만들기를 하는가를 거쳐 만들기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사뭇 자조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속도의 문명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신체는 존재를 3차원에 붙잡아매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미 포스트-스펙터클의 사회로 진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지는 것도 바로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문을 열면 탁 트인 새하얀 공간이 드러난다.

       한편 흥미로운 점은 이런 전시형태가 대안적이라거나 비판적이라고 자처하는 새로운 전시공간을 통해 더욱 세련된 형태로 복제되고 증폭된다는 점이다.

       다 저랑 비슷한 나이대인데 이제 데뷔하는 작가들한테 우리 세대가 하는 일을 보라는 식으로밖에 할 말이 없거든요.

       보고 듣는 방식의 변화는 시각적 인지체계의 변화를 야기하고 더 나아가 작품 제작 방식의 변화에도 일조한다.

       알다시피 절박한 문제는 내 그림들이 팔려야 내 작업이 가능하다는 거야.

       즉 이미 주어진 체계와는 다른 방식의 플레이 혹은 삶의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