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존재 이유를 묻는다면 저는 예술이 절대적으로 있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곳일수록 작가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GPS 버튼을 연속으로 두드려 유닛이 쳐다보고 있는 각각의 방향을 가늠해보자.

       유연하게 움직이는 사진과 텍스트의 몸놀림은 묵직한 주제와는 다른 층위로 즐길 수 있는 전시의 매력.

       생각해봐야 해요.

       기존의 주름에 대한 변혁의 의지 그러나 현실적인 수행의 의지가 결여된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파고드는 초현실의 세계가 바로 신세대 작가들이 그려내는 심리적 내러티브인 것이다.

       때로는 실망이나 회의를 겪게 되기도 합니다.

       이대로 간다면 미술관은 더욱 온순해질 것이고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현대미술의 비판적 상상력은 장려되기는커녕 시도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연출과 라이브의 경계가 상당히 모호해 보인다.

       신기한 일이었다.

       최근에는 물질세계에 기생 증식하는 3d이미지-사물에 관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일반 대중들은 전문가들이 질린 작품을 현대미술 작품보다 더 선호하는가 이는 아래에 언급할 게으른 대중과 게으른 미술인들 모두의 책임이 있다.

       물론 굿-즈에 있던 것도 다 작품이죠.

       이러한 방식은 과잉된 이미지가 작가의 망막을 자극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 과정에서 의미있는 무언가를 찾길 바라며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오늘날의 현대미술은 눈앞의 답을 많이 찾는 것 같아요.

       그것은 우리의 관계.

       개인전을 계기로 글을 받은 작가(노원희)는 비평가(안소현)에게 조목조목 이견을 드러내는 답글을 썼고 좀처럼 비평문을 청탁하지 않지만 스스로 글을 쓰고 전시를 만드는 작가(홍진훤)는 경계 없는 비평적 행위를 이야기했다.

       이걸로 모든 큐브를 다 조립할 수 있어요.

       작가는 사물과 시간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조합을 시도함으로써 냉장고를 변형시켜 탁자로 기능하게 하는 등 대상에 새로운 역할을 부여합니다.

       물론 물리적인 것도 있긴 하죠.

       기계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넘어 예술작품 수준의 창작을 해내는 기술 환경은 예술과 창의성에도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이런 전시는 곤란하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미 포스트-스펙터클의 사회로 진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지는 것도 바로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디지털 문화가 잠식한 신중세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굳이 《뉴 스킨: 본뜨고 연결하기》 도록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작가가 신생공간에서의 활동을 자신의 이력서에 써넣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국적을 불문하고 전문인으로서 한국과 한국미술을 잘 알고 아시아와 세계의 현대미술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고 경험이 풍부한 관장이 선임되는 것이 당연하다.

       다 저랑 비슷한 나이대인데 이제 데뷔하는 작가들한테 우리 세대가 하는 일을 보라는 식으로밖에 할 말이 없거든요.

       부질없을지 모를 환상이 그를 살게 의욕하고 끝내 기록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싱크대를 뜯어낸 벽면에 남겨진 타일을 프레임 삼아 내걸린 그림 안방과 욕실을 가르던 벽에 난 창문 틀을 통해 보여지는 그림.

       같은 반이었다는게 실감이 안 날 정도로 낯선 그 아이가 학교에서 죽었다.

       노력 없이도 행복한 삶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실험의 결과로서 이번 전시는 오늘날 젊은-여성-예술가들의 자기정체감을 미술형식 속에 이입하고 작동시키는 방식을 보여준다.

       두번째 질문은 그럼 변기가 아니라 다른 해괴한 걸 전시하면 예술이냐는 질문에 막혔다.

       어느 쪽이든 전통적인 작가주의와 기술 매체의 어색한 결합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